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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金緣)

[요약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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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자유(子裕)
호(號)운암(雲巖)
생년1487(성종 18)
졸년1544(중종 39)
시대조선전기
본관광산(光山)
활동분야문신 > 문신
김효로(金孝盧)

[상세내용]

김연(金緣)
1487년(성종 18)∼1544년(중종 3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산(光山). 자는 자적(子迪) 또는 자유(子裕), 호는 운암(雲巖).

성균관생원 김효로(金孝盧)의 아들이다.

1510년(중종 5) 생원시‧진사시의 양과에 급제하였다.

1519년 33세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가 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거쳐 1524년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어, 당시 권신으로 횡포를 부리던 김안로(金安老)의 비행을 논박하여 파직시켰다. 그리고 자신도 노부모 봉양을 구실로 귀양(歸養)을 요청하여 근읍의 수령으로 나갔다.

그뒤,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올랐는데 이때 김안로일당인 심언광(沈彦光)채무택(蔡無擇) 등이 김안로를 복직시키려 하자, 이언적(李彦迪)과 함께 이를 끝까지 반대하여 김안로의 미움을 샀다.

1531년 김안로가 다시 실권을 잡으면서 반대파를 제거할 때 경성통판(鏡城通判)으로 좌천되었다.

그러나 1537년 김안로가 주살되고, 그 일당이 축출되면서 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으로 다시 발탁되었다. 이어 1542년 승정원동부승지(承政院同副承旨)우부승지(右副承旨)를 역임하면서, 국왕의 측근에서 특히 농정(農政)에 관심을 보였다.

강원도관찰사에 제수되어 당시 한발이 심해 폐단이 많았던 영동 지방에 대한 구황사업(救荒事業)에 힘써 도내의 백성들이 모두 그의 치적에 감복하였다.

1544년 경주부윤에 임명되어, 임지에서 죽었다.

[참고문헌]

中宗實錄
國朝人物考
國朝榜目

[집필자]

최완기(崔完基)
수정일수정내역
2005-11-302005년도 지식정보자원관리사업 산출물로서 최초 등록하였습니다.